랫 레이스 Ratrace

.우수와 좌절의 분위기로 둘러싸여 있던 <제3의 사나이>의 전후의 빈(비엔나)과 비교해, 애상적인 감상주의는 거의 휘발되다시피하고 패배주의적이고 묵시록적인 숙명론의 냄새가 더 강하게 풍기는 곳이 <랫 레이스>에 그려진 미래의 빈의 모습이다. <랫 레이스>의 배경인, 예전에 빈이라 불렸던 이 도시는 통화(通貨)가 이미 붕괴되었고 암시장에선 인간의 장기(臟器)와 마약이 값나가는 상품으로 거래되는 그런 곳이다. 몇 개의 구역들로 나뉘어진 이 도시에서 권력을 쥐고있는 것은 이 두 가지 ‘상품들’을 모두 다룰 줄 아는 의사들이다. <랫 레이스>는 이런 참담한 미래를 소름끼치게 묘사한 SF영화인 동시에 불가항력적인 딜레마에 빠진 무력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콘트라스트가 강한 흑백의 거친 화면 속에 담은 필름 누아르풍 영화다.
쥐 경주(rat race)에서 많은 돈을 잃은 주인공 카터는 경주 소굴의 무리들로부터 손가락을 잘리며 빚을 갚으라는 협박을 받는다. 카터는 난데없이 총에 맞지만 닥터에 의해 새로운 육체를 부여받고는 부활한다. 카터는 닥터를 위해 인간의 뇌를 훔치는 일을 하는 ‘브레인푸셔(brainpusher)’가 된다. 닥터는 이 도시의 가장 큰 구역을 지배하고 있는 사악한 인물로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기억을 조작하는 것이다. 그는 카터의 애인이었던 마리아마저 이 무시무시한 실험의 대상자로 쓰려 하는데... 거의 매순간 마음 속에 마리아와의 기억을 생생하게 불러오곤 했던 카터는 이제 고민에 빠진다. 그녀의 뇌에 새로운 기억이 주입된다면 이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런 그녀에게 있어 자신이란 존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악몽과도 같은 카터의 러브 스토리는 영원한 육체적 젊음과 새롭게 주입된 정신적 과거를 대립시키며 기억의 문제와 관련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기억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인간은 정신에 속하는가, 아니면 육체에 속하는가? (1999년 제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홍성남)